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라몬 막사이사이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1907년]]에 [[루손 섬]]의 잠발레스 주 이바의 유복한 [[가톨릭]] 신자 가정에서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. 타갈로그와 일로카노가 많이 혼혈된 [[상글레이]] 집안이였고, [[스페인인|스페인계]] [[메스티소]] 혈통도 적게나마 혼혈되었다. 아버지가 대학을 졸업했고 기술학교 교사인 일루스트라도스 지식인층이였고 중류층에 속했다. 아버지가 1913년에 [[미국인]] [[교장]]과의 갈등[* 교장이 낙제점을 기록한 자기 아들을 유급시키지 않는 조건으로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제안했는데, 막사이사이의 아버지가 이 제안을 씹고 교장의 아들을 유급처리해버렸다. 그 일로 인해 막사이사이의 아버지는 교사직에서 해고당했다. 막사이사이는 이렇게 일평생을 청렴하고 강직하게 살았던 아버지에게 막대한 영향을 받아서 뒷날 정치인이 되었을 때도 그는 [[청백리]]로서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살았다.]으로 실직한 후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며 [[고학]]으로 잠발레스 아카데미를 졸업했다. 당시 막사이사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도로 공사장의 인부로 뛰었는가 하면, 아버지가 목공소를 겸한 수제 도구 공장을 열자, 아버지의 공장에서 제작한 제품을 발주처에 전달하는 일도 한 적이 있었다. 거기에 [[물소]]를 키우는 축산업자 노릇을 하거나, 전술한 아버지의 공장에 공급할 [[숯]]을 굽는 일까지 하는 등[* 남동생인 [[헤수스 막사이사이]]와 함께 숯 굽는 일을 하려고 [[정글]] 지대로 들어갔다가, 갑자기 쏟아진 폭우에 떠내려가서 죽을 뻔하기도 했는데, 아버지가 급히 아들들을 구하러 달려와서 형제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.], 안 해본 일이 없었다. [[필리핀 대학교]]에 입학하고 나서는 운전기사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[[의예과]]와 [[기계공학과]]를 복수전공하다가, [[호세 리잘 대학교]]의 [[경영학과]]에 편입해 졸업한다. 1933년에는 버스정비사로 일했으며, 이때 만난 루스 반손(Luz Rosauro Banzon)과 결혼했다. 부부 사이에는 차례대로 테레시타, 밀라그로스, 라몬 2세가 태어났다. 이후 부지런함을 인정받아서 마닐라 운송회사의 총지배인으로도 있었다. [[태평양 전쟁]]이 발발하자 자원입대하여 보급담당관으로 있다가 [[1942년]]부터 항일 유격대로 활동하면서 [[미군]]이 상륙하기 전까지 1만명을 지휘하기도 했다. 이러한 이력을 바탕으로 인기를 얻어 고향인 삼발레스 주의 군정 장관으로 임명되었다가 [[1946년]]에 아내와 전 항일유격대 동료들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[[자유당(필리핀)|자유당]] 하원의원, [[1950년]]에는 [[국방장관]]을 역임했다. 당시 항일 유격대 중 [[공산주의]]를 추종했던 '후크발라하프' 그룹(이른바 '후크단')의 토벌 등 [[반공주의]]적인 행보를 이어가며 정부의 정화에 힘썼다.[* 다만 아래 평가를 보면 알겠지만, 막사이사이를 [[우익]]으로 정의내리기는 어렵다.] 무엇보다 공산주의 세력의 기반이 될 수 있는 민심을 되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, 이는 실제로 큰 성공을 거뒀다. 이때의 별명이 '[[태평양]]의 [[아이젠하워]]'. 기동성과 유연성을 중시한 것도 특징이다. 하지만 이런 개혁 정책으로 견제를 받아 해임되었으며, 그 해 선거에 나갔다. [[1953년]]의 대선에서는 [[국민당(필리핀)|국민당]](Nacionalista Party) 후보로 출마하여, 내가 먹기 전에 국민이 먹어야 한다며 자신의 아버지라도 부정을 저지르면 법대로 하겠다는 유세로 화제를 모았다. 결국 선거에서 현직 대통령인 [[엘피디오 키리노]]를 물리치고 대통령에 당선돼 그 이후로 [[복지]] 정책에 노력하였다. 대외적으로는 미국의 안보 정책에 협력하였다.[* 그는 키리노가 부패하여 공산주의가 자랄 토양을 만든다고 생각했다. (그래서 그를 후보로 삼아주겠다던 자유당의 제의도 거부했고 자유당을 탈당해 선거를 치렀다.) [[일본]] [[하토야마 이치로]] 총리와 국교 회복 조약인 네리-타카자키 협약을 맺은 것도 임기 중.] [[1954년]]에 [[마닐라]]에서 창설된 동남아시아 조약기구([[SEATO]])에 가입하였다. 1954년에는 후크단의 지도자 루이스 타룩을 투항시켜 유화책에도 놀라운 수완을 보여주었다. 이때 협상 테이블에 앉아 4개월 동안 협상을 이어간 사람이 바로 [[베니그노 아키노]]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